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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 선사 2 고대 8 고려 8 조선전기 4 조선후기 5 근대 9 일제 9 현대 4 통합 1
50개 개념 · 제79회
핵심 개념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무엇으로 시대를 가르는가 선사 시대는 돌·청동·철 중 어떤 도구를 썼는지보다, 그 도구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로 나눈다. 뗀석기를 쓴 구석기 사람들은 사냥감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고, 간석기와 토기를 쓴 신석기 사람들은 한곳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나뉘는 계급이 생겼고, 철기 시대에는 나라들끼리 다투며 국가가 만들어졌다.
구석기
도구 뗀석기(주먹도끼·찍개)
주거 동굴·강가 막집, 이동 생활
사회 무리 생활, 평등 사회
대표 유물 공주 석장리·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신석기
도구 간석기, 토기
주거 강가·해안 움집, 정착 생활 시작
사회 씨족 중심 부족 사회
대표 유물 빗살무늬 토기, 가락바퀴·뼈바늘 청동기
도구 청동제 무기·의례구(농기구는 여전히 돌)
주거 구릉지 취락, 배산임수
사회 계급 발생, 군장(족장) 등장
대표 유물 비파형 동검, 고인돌, 반달 돌칼 철기
도구 철제 무기·농기구
주거 취락 규모 확대
사회 연맹 왕국으로 발전
대표 유물 세형 동검, 명도전(중국과의 교역 흔적) ★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가락바퀴와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 막집은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핵심 개념 여러 나라의 성장 — 나라마다 「이것 하나」로 구별한다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철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이 나라들은 정치 방식, 제천 행사, 풍습, 특산물이 나라마다 뚜렷이 달라서 서로 구별할 수 있다.
부여
정치 5부족 연맹(왕 + 마가·우가·저가·구가, 사출도)
제천 행사 영고(12월)
풍습 순장, 형사취수제, 1책 12법
경제·특산물 말·주옥·모피 고구려
정치 5부족 연맹(제가 회의)
제천 행사 동맹(10월)
풍습 서옥제(데릴사위), 형사취수제
경제·특산물 산악 지형 → 약탈 경제(부경) 옥저
정치 군장 국가(읍군·삼로)
제천 행사 없음
풍습 민며느리제, 가족 공동 무덤(골장제)
경제·특산물 어물·소금(고구려에 공납) 동예
정치 군장 국가(읍군·삼로)
제천 행사 무천(10월)
풍습 책화(읍락 침범 시 배상), 족외혼
경제·특산물 단궁·과하마·반어피 삼한(마한·진한·변한)
정치 군장(신지·읍차) + 제사장(천군), 소도
제천 행사 수릿날(5월)·계절제(10월)
풍습 두레(공동 노동)
경제·특산물 변한의 철(낙랑·왜에 수출) ★ 옥저에는 제천 행사가 없었다. 삼한에는 소도라는 곳이 있었는데, 정치를 맡은 군장이 아니라 제사를 맡은 천군이 다스렸다 — 정치와 종교를 맡은 사람이 서로 달랐다는 뜻이다.
핵심 개념 한성 함락 이후 백제, 왕이 자주 바뀌다 무령왕에 이르러 안정되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잃고 개로왕이 죽는 큰 위기를 겪었다.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긴 뒤에도 한동안 왕이 자주 바뀌며 나라 안이 흔들렸지만, 무령왕 때에 이르러 다시 안정을 찾고 나라의 힘을 회복했다.
475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 함락, 개로왕 전사 →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 477 문주왕이 병관좌평 해구에게 살해됨 → 13세의 어린 삼근왕 즉위 479 삼근왕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남 → 동성왕 즉위 501 동성왕이 백가에게 살해됨(백가의 난) → 무령왕 즉위,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을 다시 세움 502 지방 22담로에 왕족을 보내 지방을 직접 통제 ★ 무령왕은 삼근왕·동성왕을 거치며 흔들리던 백제를 안정시키고, 지방 22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제를 강화했다.
금관가야는 시조 김수로왕이 낙동강 하류 김해 지역에서 일으킨 나라로,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질 좋은 철이 많이 나는 땅 덕분에 덩이쇠(철 소재)를 화폐처럼 쓰면서 낙랑과 왜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는 시기가 다른 여러 무덤이 함께 있어, 금관가야가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성장하고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금관가야(전기 가야 연맹)
중심지 김해, 시조 김수로왕
전성기 3~4세기
경제 덩이쇠 생산, 낙랑·왜와의 중계 무역
쇠퇴·멸망 400년 광개토 대왕이 보낸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크게 꺾임 → 532년 법흥왕 때 신라에 항복 대가야(후기 가야 연맹)
중심지 고령
전성기 5세기 후반, 소백산맥 서쪽까지 세력 확장
경제 우수한 철제 무기·토기 생산
멸망 562년 진흥왕 때 신라에 멸망 ★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것은 금관가야를 비롯한 전기 가야 연맹의 대표적인 경제 활동이다.
고대 통일 신라의 유학과 학문 · 제79회 5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통일 신라의 3대 문장가 — 강수·설총·최치원 통일 신라는 유학을 공부해 뛰어난 글솜씨를 뽐낸 학자를 여럿 배출했다. 그 가운데 강수, 설총, 최치원을 흔히 신라의 3대 문장가라 부른다.
강수
활동 시기 태종 무열왕~신문왕(7세기)
특기 외교 문서 작성 — 청방인문표(김인문 석방을 청함), 답설인귀서(671, 당 장수 설인귀에게 보냄) 설총
가계 원효의 아들
업적 이두 정리(한자의 음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 화왕계 저술(꽃에 빗대어 왕에게 충언) 최치원
출신 6두품
활동 당에 유학해 빈공과 급제, 계원필경(문집)·토황소격문(황소의 난 격문) 저술
귀국 이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당에 갇힌 김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청방인문표를 지은 것은 강수다.
핵심 개념 백제부터 조선까지, 탑의 재료와 모양이 시대를 말해 준다 탑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뚜렷이 다르다. 백제와 신라 초기의 탑은 나무로 짓던 목탑의 모양을 돌로 옮긴 것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벽돌로 쌓은 탑, 여러 모서리를 가진 탑처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다.
백제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특징 목탑 양식을 이어받아 얇고 넓은 지붕돌을 얹은 5층 석탑
일화 당 장수 소정방이 백제 정벌 기념 글귀를 새겨 한때 평제탑으로 불림 통일 신라 —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특징 기단 네 모서리에 돌사자를 세우고 그 가운데 승려상을 둔 3층 석탑 통일 신라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특징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7층 전탑, 국내에 남은 전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됨 고려 —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특징 8각 기단에 9층 탑신을 올린 다각 다층 석탑, 고려 전기에 유행 조선 — 보은 법주사 팔상전
특징 국내에 남은 유일한 목탑, 내부에 부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를 모심 ★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사사자삼층석탑과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통일 신라,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법주사 팔상전은 조선의 문화유산이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참고해 나라의 틀을 갖추면서도, 스스로 연호를 정해 쓰며 독립된 나라임을 내세웠다. 왕이 바뀔 때마다 새 연호를 정했기 때문에, 그 왕의 재위 기간을 연호로 부르기도 한다.
698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 건국(고왕) 무왕(인안) 영토를 크게 넓히고, 장문휴를 보내 산둥반도의 당군을 선제공격(732) 문왕(대흥) 3성 6부 정비, 주자감 설립, 상경성으로 천도 선왕(건흥) 옛 고구려 땅 대부분을 되찾아 「해동성국」이라 불림 ★ 인안(무왕)과 대흥(문왕)은 발해가 스스로 정해 쓴 독자적인 연호다.
핵심 개념 신라의 국학에서 조선의 성균관까지, 최고 교육 기관의 계보 삼국 시대 이후 여러 나라는 유교 경전을 가르쳐 인재를 기르는 국립 교육 기관을 두었다. 이름과 운영 방식은 시대마다 달랐다.
고구려 태학
설립 소수림왕 372년
운영 수도에 설치,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 교육 신라 국학
설립 신문왕 682년
운영 박사·조교를 두고 유교 경전 교육, 대사 이하 관등 소지자가 입학 고려 국자감
설립 성종 992년
운영 전문 강좌인 7재 운영(예종), 장학 재단 양현고 설립(예종) 조선 성균관
설립 태조 때
운영 생원시·진사시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 부여, 대사성이 수장 ★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가르친 것은 신라의 국학이다.
신라 말 왕권이 흔들리자 지방에서 여러 세력이 새 나라를 세웠다. 궁예는 송악(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뒤,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도 여러 차례 바꾸며 독자적인 정치 기구를 갖추어 나갔다.
901 궁예, 송악을 도읍으로 후고구려 건국 904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광평성 등 정치 기구를 마련 905 도읍을 철원(부양)으로 옮김 911 국호를 태봉으로 바꿈 918 신하들의 신망을 잃은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해 고려를 세움 ★ 광평성 등 정치 기구를 마련한 것은 궁예다.
고대 신라 하대의 혼란과 호족 · 제79회 10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신라 하대, 왕위를 둘러싼 다툼과 지방의 반란 780년 혜공왕이 반란 속에서 죽은 뒤, 신라는 진골 귀족들이 서로 왕위를 다투는 혼란기에 들어섰다. 중앙 정치가 흔들리는 사이 지방에서도 불만을 품은 세력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780 김지정의 난 속에서 혜공왕 피살, 무열왕계 왕위 계승이 끊기고 내물왕계 선덕왕 즉위 822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828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건의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838 흥덕왕 사후 왕위 다툼 끝에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사 도움으로 즉위 841~846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다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장보고가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꾀하다 암살됨 ★ 김헌창의 난(822)은 혜공왕 피살(780) 이후, 장보고의 반란 시도(841~846) 이전, 신라 하대 혼란기에 일어났다.
핵심 개념 고려의 공예 — 상감청자와 금속 공예 고려는 독자적인 도자기 기술과 금속 공예 기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상감 기법으로 만든 청자는 고려만의 독창적인 예술로 꼽힌다.
상감청자
기법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다른 색 흙(백토·자토)을 메워 무늬를 내는 상감 기법
대표작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금속 공예
은입사 청동 표면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박아 무늬를 내는 기법
대표작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인쇄
직지심체요절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 그릇에 다른 색 흙을 메워 무늬를 내는 상감 기법으로 만든 청자는 고려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핵심 개념 고려의 상업과 수공업 — 소(所)와 벽란도 고려는 화폐를 만들어 쓰고 관청이 상점을 직접 운영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상업을 뒷받침했다. 특수 행정 구역인 소(所)에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소(所)
성격 향·부곡과 함께 일반 군현보다 차별받은 특수 행정 구역
생산 금·은·철·자기·종이·먹 등 국가 수요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 화폐
주조 건원중보(성종, 996, 최초의 금속 화폐), 해동통보·삼한통보 등(숙종, 의천의 건의로 주전도감 설치)
한계 널리 쓰이지 못하고 곡식과 베가 주된 거래 수단으로 남음 무역
벽란도 예성강 하구의 국제 무역항, 송·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듦 ★ 특수 행정 구역인 소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것은 고려 수공업의 특징이다.
거란(요)은 고려를 세 차례 침입했다. 고려는 외교와 전투를 오가며 이를 물리쳤고, 그 과정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을 담아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993 (1차 침입, 성종) 소손녕이 침입 →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 확보 1010 (2차 침입, 현종)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 개경 함락 →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 양규가 흥화진·귀주 등에서 항전 1011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길 기원하며 초조대장경 조판 시작 1018~1019 (3차 침입, 현종) 소배압이 침입 → 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격퇴(귀주대첩) ★ 초조대장경 조판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길 기원하며 현종 때(1011) 시작되었다.
핵심 개념 이자겸의 난에서 무신정변까지, 흔들리는 문벌 귀족 사회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는 여러 차례 큰 사건을 겪으며 흔들렸다. 외척이 왕권을 위협하는 난이 일어나고, 서경 천도를 둘러싼 반란이 이어지더니, 결국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126 이자겸의 난 — 외척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으나, 인종이 척준경을 이용해 이자겸을 제거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천도가 무산되자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란(국호 대위, 연호 천개) →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됨 1170 무신정변 — 이고·이의방 등이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음 119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씨 무신 정권 시작 1198 만적이 개경에서 노비를 모아 반란을 모의했으나 발각됨 ★ 묘청의 난 진압(1135)은 이자겸의 난(1126) 이후, 무신정변(1170) 이전의 일이다.
핵심 개념 고려의 역사서 — 삼국사기에서 제왕운기까지 고려 시대에는 여러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썼는지, 무엇을 강조했는지가 책마다 달랐다.
삼국사기(김부식, 1145)
형식 기전체(본기·열전 등으로 나눔)
특징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 신라 역사를 상대·중대·하대로 구분 삼국유사(일연, 1281)
형식 자유로운 구성
특징 고조선의 단군 건국 이야기를 비롯한 불교·설화를 폭넓게 수록 제왕운기(이승휴, 1287)
형식 서사시
특징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서술,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강조 동명왕편(이규보, 1193)
형식 서사시
특징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의 일생을 다룸 ★ 고조선의 단군 건국 이야기가 실려 있는 역사서는 삼국유사다.
핵심 개념 원 간섭기, 고려에 들어온 몽골 풍습과 간섭 기구 원의 간섭을 받던 시기, 고려에는 몽골의 풍습이 들어와 지배층 사이에 유행했다. 원은 고려의 정치와 국경 지역에 간섭하는 여러 기구도 함께 두었다.
풍습
몽골풍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호복(몽골식 복장), 몽골식 이름과 말이 유행
고려양 반대로 고려의 풍습(고려병, 고려떡 등)이 몽골에 전해짐 간섭 기구
정동행성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되었다가, 이후 내정 간섭 기구로 남음
응방 매 사냥에 쓸 매를 관리, 백성에게 폐단을 끼침
쌍성총관부·동녕부·탐라총관부 고려 영토 일부를 원이 직접 지배 왕실
혼인 고려 왕이 원의 공주와 혼인해 원의 부마(사위)가 됨
호칭 격하 폐하→전하, 짐→고(孤) 등 왕실 용어가 낮춰짐 ★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이 유행한 것은 원 간섭기의 사회 모습이다.
고려 신진 사대부와 고려의 멸망 · 제79회 17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조선을 열기까지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자기 것으로 삼겠다고 통보하자(1388년 2월),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했다. 하지만 정벌군을 이끌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개경으로 향했고, 이 일을 계기로 권력을 잡아 결국 새 왕조를 열었다.
1388.2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 → 우왕·최영이 요동 정벌을 결정 1388.5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림(위화도 회군) 1388.6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 일파가 최영을 유배 보내고 우왕을 폐위, 창왕을 세움 1391 신진 사대부의 주도로 과전법을 실시해 토지 제도를 개혁 1392 정몽주가 살해되고, 공양왕이 폐위되며 이성계가 조선을 세움 ★ 이성계가 요동으로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되돌린 것이 위화도 회군이며, 그 직후인 1388년 6월 최영이 유배되고 우왕이 폐위되었다.
핵심 개념 이색, 성균관에서 신진 사대부를 길러내다 고려 말 원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돌아온 이색은 성균관을 다시 정비해 학자를 길러냈다. 이곳에서 배운 이들은 이후 고려 말 정치를 이끄는 신진 사대부로 성장했다.
1352 무렵 이색, 원에 유학해 성리학을 공부 1367 공민왕이 성균관을 다시 세우자 대사성으로 임명되어 정몽주·김구용 등을 학관(교관)으로 채용, 성리학을 가르침 1370 무렵 정도전이 성균관 박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 고려 말 이색은 온건 개혁파로 남아, 새 왕조 건국에 나선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와 갈라섬 ★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등을 학관으로 천거한 것은 이색이다.
세종은 학문과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 백성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여러 성과를 남겼다.
천문·역법
칠정산 내편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 중국 역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
관측 기구 혼천의·간의(천체 관측), 자격루·앙부일구(시간 측정) 농업
농사직설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
측우기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 ★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은 세종 때 편찬되었다.
핵심 개념 토지 제도의 변천 — 역분전에서 직전법까지 고려와 조선은 관리에게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수조권)를 주는 방식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세습되는 토지가 늘어 새로 지급할 땅이 부족해질 때마다 새 제도를 마련했다.
940 태조, 공신에게 역분전 지급(논공행상 성격) 976 경종, 시정 전시과 실시 — 관리 등급에 따라 전지·시지 지급 1271 원종, 무신 정권기 이후 지급할 땅이 부족해지자 경기 8현에 한정해 녹과전 지급 1391 공양왕, 신진 사대부 주도로 과전법 실시 — 경기 땅에 한해 관리에게 수조권 지급 1466 세조, 과전이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는 직전법 실시 성종 관리가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직전법의 폐단이 심해지자, 국가가 대신 세금을 거두어 나누어 주는 관수관급제 실시 ★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준 것은 직전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관수관급제(성종)다.
핵심 개념 조선 후기 서민 문화 — 한글 소설과 판소리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서당 교육이 널리 퍼지면서, 양반이 아닌 사람들도 즐기는 문화가 자라났다.
문학
한글 소설 춘향전·홍길동전 등이 널리 읽힘
관련 직업 세책가(책을 빌려주는 가게), 전기수(소설을 읽어 주는 사람) 공연·그림
판소리·탈춤 판소리(춘향가 등), 탈춤(양반을 풍자)
민화·풍속화 서민의 소망을 담은 민화,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 상업·무역
초량 왜관 부산에 자리한 대일 무역·외교 거점(1678~)
사상 의주 만상, 개성 송상, 동래 내상 등이 활발히 활동
화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됨 ★ 초량 왜관에서 일본 상인과 교역한 것은 조선 후기 대외 무역의 모습이다.
핵심 개념 임진왜란 종전에서 정묘호란까지, 조선의 대외 관계 격변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북쪽에서는 후금(훗날의 청)이 새롭게 힘을 키워, 결국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1598 왜군이 철수하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남 1608~1623 광해군,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폄 1619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에 참전, 후금에 항복 1623 인조반정 → 서인 정권이 친명배금 정책을 폄 1627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켜 침입,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 → 정묘화약(형제 관계)으로 강화 1636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 조선이 거부하자 병자호란을 일으킴 ★ 강홍립의 사르후 전투 참전(1619)은 임진왜란 종전(1598) 이후, 정묘호란 강화(1627) 이전의 일이다.
숙종 이후 붕당 간 다툼이 심해지자, 영조는 왕위에 오르며 탕평책을 내세워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즉위 초 벌어진 이인좌의 난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1724 영조 즉위 1728 이인좌 등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1742 탕평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움 1750 군포 부담을 줄여 주는 균역법 실시 ★ 이인좌를 중심으로 한 반란(1728)은 영조 즉위 초에 일어났다.
조선전기 조선의 중앙 정치 제도 · 제79회 24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별칭으로도 구별한다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는 저마다 다른 일을 맡았고,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승정원
역할 왕명 출납(왕의 비서 기관), 수장은 도승지
별칭 은대, 후원 홍문관
역할 경연 주관, 왕에게 학문적 자문, 대제학이 수장 비변사
역할 국방·군사 문제를 논의하던 임시 기구로 출발, 을묘왜변(1555)을 계기로 상설화, 임진왜란 이후 최고 정치 기구로 격상 규장각
역할 정조 때 설치, 왕실 도서관 겸 학술 연구 기관, 업무 일지인 내각일력 작성, 검서관에 서얼을 등용 사헌부·사간원(대간)
역할 5품 이하 관리 임명 시 서경권(동의권) 행사 ★ 은대, 후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정원이다.
핵심 개념 중상주의 실학자들, 청의 문물을 배우자고 하다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은 청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중상학파(북학파)라 부른다.
홍대용
저서 의산문답
주장 지전설(지구가 돈다는 주장)과 무한 우주론, 성리학적 세계관 비판 박지원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주장 수레·화폐 유통 확대, 양반의 허례와 무능 풍자 박제가
저서 북학의
주장 소비를 우물물에 비유해, 적절한 소비가 오히려 생산을 늘린다고 주장 ★ 무한 우주론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은 것은 홍대용이다.
조선후기 조선 후기의 신분 변동 · 제79회 26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조선의 중인 — 기술과 행정 실무를 맡다 조선의 신분은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중인은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맡아 나라 살림을 뒷받침했다.
역관
소속 사역원
업무 외국어 통역·번역, 노걸대·박통사(중국어 교재) 등으로 학습
등용 잡과(역과) 합격 의관
소속 전의감·혜민서
업무 의료
등용 잡과(의과) 합격 서리·향리
업무 중앙·지방 관청의 행정 실무 담당 서얼
성격 양반 첩의 자식, 문과 응시에 제한을 받음
조선 후기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통청 운동을 전개 ★ 노걸대 등을 교재로 삼아 외국어를 공부한 것은 역관이다.
핵심 개념 홍경래의 난 — 세도 정치기, 서북 지역의 불만이 터지다 세도 정치 시기, 정치는 어지럽고 지역에 대한 차별과 수탈은 심해졌다. 특히 평안도 (서북) 지역은 차별이 심하다는 불만이 컸고, 1811년 홍경래 등이 이를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1811.12 홍경래, 우군칙 등이 평안도 가산에서 봉기, 청천강 이북 여러 고을을 점령 1812 관군에 밀려 정주성에서 농성하다 5개월 만에 진압됨 1862 세도 정치의 폐단이 계속되어 진주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남,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됨 ★ 홍경래, 우군칙 등이 주도한 것은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
핵심 개념 개항기, 열강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조선을 침탈했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으로 나라 문을 열었다. 이 앞뒤로 여러 나라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조선에 다가왔다 — 배를 보내 무역을 하자고 하기도 하고, 힘으로 쳐들어오기도 하고, 힘이 약해진 조선 정부를 틈타 이권을 가져가기도 했다. 프랑스는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도를 쳐들어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빼앗아 갔고, 그 뒤 끊어졌던 두 나라의 관계는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으로 다시 이어졌다.
미국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신미양요
연도 1866 → 1871
결과·이권 어재연 부대 항전(광성보), 이후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에서 최혜국 대우 미국 — 아관 파천 이후 이권 침탈
연도 1896~
결과·이권 운산 금광 채굴권 프랑스 — 병인박해 → 병인양요
연도 1866
결과·이권 외규장각 의궤 약탈, 정족산성(양헌수)에서 격퇴 프랑스 —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연도 1886
결과·이권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게 사실상 허용됨 영국 — 거문도 사건
연도 1885~1887
결과·이권 러시아 남하를 막는다는 핑계로 강제 점령 러시아 — 용암포 사건
연도 1903
결과·이권 압록강 하구 조차 요구 → 러일 전쟁의 배경 ★ 외규장각을 약탈해 간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일으켰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는 미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차지한 것은 영국이 한 일이다.
핵심 개념 임오군란, 구식 군인의 불만이 국제 문제로 번지다 1882년, 별기군(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봉급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 소요는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과 청·일 군대의 개입으로 이어지며 국제 문제로 번졌다.
1882.6 구식 군인의 봉급 밀림과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이 폭발 → 임오군란, 흥선 대원군 재집권 1882.7 청군이 개입해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 민씨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음 1882.8 조선-일본 제물포 조약 체결(배상금 지급, 일본군 주둔 허용), 조선-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청 상인의 내지 통상권 확보) ★ 임오군란(1882)의 수습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0년 조선 정부는 개화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그 아래 여러 부서(사)를 두어 외교, 군사, 통상 등의 업무를 나누어 맡겼다.
1880 통리기무아문 설치, 그 아래 12사를 두어 업무 분담 1881 중앙군을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일본인 교관 초빙); 조사 시찰단(일본)·영선사(청) 파견 1882 임오군란으로 통리기무아문 폐지 → 이후 통리아문·통리내무아문 등으로 개편 ★ 중앙군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한 것은 통리기무아문이 추진한 개화 정책이다.
핵심 개념 갑오·을미개혁, 교육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꾸다 1894년부터 조선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거치며 정치·사회 제도를 크게 바꾸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는 근대적 학교 제도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894 1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 주도) —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1895.2 고종, 교육입국조서 반포 —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키자는 뜻을 밝힘 1895 한성 사범 학교 관제와 소학교령 반포 1895.8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895.11 단발령 시행 → 을미의병 발생 1896.2 아관파천 ★ 교원을 길러 내는 한성 사범 학교 관제는 1895년, 교육입국조서 반포 직후 마련되었다.
근대 러일 전쟁과 한일 의정서 · 제79회 32번 문제 보기 →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조약을 잇달아 강요했다. 이 조약들은 결국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데까지 이어졌다.
1904.2 러일 전쟁 발발 →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요, 대한제국 영토를 군사 기지로 쓸 권리 확보 1904.8 1차 한일협약(고문 정치) — 재정 고문 메가타, 외교 고문 스티븐스 파견 1905.11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 —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1907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차관 정치),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10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 피탈 ★ 한일의정서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1904.2)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요한 조약이다.
핵심 개념 을미의병에서 정미의병까지, 항일 의병의 세 물결 조선 말 항일 의병은 나라 안팎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세 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다.
을미의병(1895~1896)
계기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
중심 인물 유인석, 이소응 등 위정척사파 유생
결과 아관파천(1896.2) 이후 고종의 단발령 취소·해산 권고로 대부분 스스로 흩어짐 을사의병(1905~)
계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
중심 인물 최익현, 신돌석(평민 출신 의병장) 등 정미의병(1907~)
계기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특징 해산 군인이 합류해 전투력 강화, 13도 창의군 결성(총대장 이인영) 후 서울 진공 작전 시도
이후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1909)으로 위축, 일부는 만주·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으로 전환 ★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해산을 권고하자, 을미의병은 1896년 무렵 대부분 스스로 흩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구본신참)는 원칙 아래 개혁을 폈다. 황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인 토지 제도도 함께 마련했다.
1897.10 대한제국 선포, 연호 광무 1899 대한국 국제 반포(전제 군주제를 명문화), 원수부 설치(황제가 대원수가 되어 군 통수권을 직접 장악) 1901 지계아문 설치, 양전 사업으로 토지를 측량하고 근대적 토지 소유 증명서인 지계를 발급 ★ 원수부 설치(1899) 이후, 지계아문이 지주에게 지계를 발급한 것(1901)은 광무개혁의 대표적인 성과다.
핵심 개념 국채 보상 운동 — 나라 빚을 갚아 주권을 지키자 1907년, 일본에 진 나라 빚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 자주권을 지키자는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1907.2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 국채보상기성회 조직 1907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 언론이 적극 지원해 전국으로 확산, 남자는 금연·여자는 패물을 내놓는 방식으로 참여 1907~1908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양기탁 구속 등)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단됨 ★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의 지원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국채 보상 운동이다.
근대 애국 계몽 운동과 신민회 · 제79회 36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신민회 — 비밀 결사로 공화정을 꿈꾸다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등은 국권 회복과 공화정체 국가 수립을 목표로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교육, 산업, 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 실력을 기르는 활동을 벌였다.
국내 활동
교육 오산 학교(이승훈), 대성 학교(안창호) 설립
산업 태극 서관, 자기 회사를 운영해 민족 자본 육성
언론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 기관지로 활용 국외 활동과 해체
독립운동 기지 서간도 삼원보에 신흥 강습소(훗날 신흥 무관 학교) 설립
해체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와해 ★ 국권 회복과 함께 공화정체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은 신민회다.
일제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 · 제79회 37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1920년대, 대중문화와 문학의 새 흐름 1920년대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우면서, 신문·잡지 발행이 다소 늘고 대중문화도 자라났다. 문학에서는 식민지의 고단한 현실을 담아내려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1920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925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결성 — 계급 의식을 담은 신경향파 문학 주도 1926 나운규가 감독·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그림 ★ 카프에서 신경향파 문학을 이끈 것은 192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핵심 개념 1920년대 노동·농민 운동의 조직화 1920년대 들어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쟁의를 벌였다. 처음엔 노동자와 농민이 한 조직에 모였다가, 점차 각자의 단체로 나뉘어 활동을 키워 갔다.
1920 조선노동공제회 결성 — 최초의 전국적 노동 운동 단체 1923 암태도 소작쟁의(전남 신안) — 소작료 인하를 요구해 1년 가까이 투쟁, 성공 1924.4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원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광범위한 활동 전개 1927.9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 1929.1 원산 총파업 — 문평 라이징 선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원산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한국 노동 운동 사상 최대 규모) ★ 조선노농총동맹 결성(1924) 이후, 1929년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다.
핵심 개념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전국으로 번지다 1929년 11월,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전국 각지로 번져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 학생 운동으로 발전했다.
1929.10~11 나주-광주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 충돌 →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 발생 1929.11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열려다 간부들이 체포됨 1930 시위가 전국 각지 학교로 확산 ★ 광주 학생들의 시위 운동에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지원했다.
일제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통치 · 제79회 40번 문제 보기 →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국내 신문들은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다. 이 일로 일제의 언론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뒤이어 민족 말살 통치가 본격화되었다.
1936.8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 획득 → 동아일보 등이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일장기 말소 사건), 조선총독부의 검열 강화·동아일보 무기 정간 1937 중일전쟁 발발, 황국신민서사 제정 1938 3차 조선교육령(조선어 사용 억제), 국가총동원법 시행 1941 소학교라는 명칭을 국민학교로 변경(황국신민의 학교라는 뜻) ★ 일장기 말소 사건(1936) 이후, 1941년 소학교라는 명칭이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일제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 · 제79회 41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방정환과 어린이날 — 소년 운동의 시작 방정환은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뜻에서 소년 운동을 이끌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리고, 어린이날을 만든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21 방정환의 주도로 천도교 소년회 조직 1922 어린이날 제정(5월 1일, 훗날 5월 5일로 변경) 1923 잡지 「어린이」 창간, 색동회 조직 ★ 천도교 소년회를 이끌며 어린이날을 만든 것은 방정환이다.
일제 국어 연구와 조선어 학회 · 제79회 42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국어 연구 단체의 계보 — 국문 연구소에서 조선어 학회까지 한글을 지키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을 지키는 활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국문 연구소(1907)
소속 대한제국 학부
활동 주시경 등이 참여해 한글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연구 조선어 연구회(1921)
활동 가갸날(한글날의 전신) 제정, 잡지 「한글」 발행 조선어 학회(1931, 조선어 연구회 개편)
활동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표준어 제정(1936), 「우리말 큰사전」 편찬 시도
해체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강제 해산, 회원들이 옥고를 치름 ★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한 것은 조선어 학회다.
일제 병참 기지화와 인력 수탈 · 제79회 43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전시 체제기, 일제의 인력·물자 수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조선에서 최대한 끌어모으려 했다.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1937 중일전쟁 발발, 황국신민서사 제정, 신사 참배 강요 1938 국가총동원법 시행 — 인력·물자를 전쟁에 강제로 동원할 법적 근거 마련,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 1939 국민징용령 실시 — 조선인을 광산·공장 등에 강제 동원 1940년대 초 미곡 공출제, 금속류 회수령(놋그릇·솥 등 강제 공출)으로 생활필수품까지 전쟁 물자로 거둬감 1944 여자 정신 근로령 — 여성까지 강제 동원 ★ 국가총동원법(1938)은 사람과 물자를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법이었다.
핵심 개념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정규군을 갖추었다. 연합군과 함께 싸우며 국내 진공까지 준비했다.
1940.9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총사령 지청천) 1941.12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일 선전 포고 1942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전력 강화 1943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어 포로 심문·정보 수집 등을 맡음 1945 미군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함 ★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한 것은 한국광복군이다.
현대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 · 제79회 45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광복 직후 3년, 그리고 제주 4·3 사건이 놓인 자리 제주 4·3 사건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남한만 따로 정부를 세우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무장대)과 이들을 진압하려던 군대·경찰(토벌대)이 부딪히면서, 죄 없는 제주도 주민들이 아주 많이 희생되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기까지 이어진 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1945.8 8·15 광복, 국토 분단 1945.1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신탁 통치 결정 1946~47 미소 공동 위원회 (1·2차, 결렬) 1947.11 유엔, 남북 총선거 결의 1948.4 제주 4·3 사건 시작 — 단독 선거에 반대해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됨 1948.5.10 5·10 총선거 (제주 일부 지역은 선거 무산) 1948.8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10 여수·순천 10·19 사건 — 4·3 진압을 위한 출동을 거부하며 일어남 2000.1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 4·3 사건은 정부가 세워지기 전(1948년 4월)에 시작해서 정부가 세워진 뒤(여수·순천 사건, 1948년 10월)까지 이어졌고, 2000년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진상 규명이 시작되었다.
일제 임시 정부의 활동과 개편 · 제79회 46번 문제 보기 → 핵심 개념 김구, 한인 애국단에서 남북 협상까지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오랫동안 이끈 인물이다. 의열 투쟁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광복 이후에는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1931 상하이에서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 애국단 조직 1932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의 도쿄 의거,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1940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 1940~1945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충칭에 자리한 시기 주석으로 활동 1948 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을 추진해 평양을 방문,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 ★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활동이었고, 김구는 임시 정부가 충칭에 있을 때 주석을 지냈다.
핵심 개념 서독 파견 광부·간호사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0년대 초, 정부는 실업 문제를 해소하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62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작 — 정부 주도로 수출 지향 경공업을 육성 1963~1977 서독에 광부 약 8,000명 파견(1966년부터는 간호사 약 1만 명도 국가 차원에서 파견), 이들이 보낸 외화가 경제 개발 자금으로 쓰임 1964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파견 광부·간호사를 격려 1967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작 — 경공업 중심을 이어가며 화학·철강 등 기반 마련 1970년대 제3·4차 계획 —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방향을 전환 ★ 1960년대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한 것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외화벌이의 일환이었다.
핵심 개념 4·19 혁명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민주화의 흐름 광복 이후 한국은 여러 차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적 저항을 겪었다. 그때마다 정권이 무너지거나 제도가 바뀌었다.
1960.4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해 4·19 혁명 발생, 이승만 하야 1972 유신 헌법 공포(박정희 장기 집권 체제) 1979.10 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촉발한 부마 민주 항쟁 → 10·26 사건으로 박정희 피살, 유신 체제 붕괴 1980.5 5·18 민주화 운동 — 신군부의 계엄 확대에 저항, 시민군이 조직되었으나 무력 진압됨 1987.6 박종철 고문치사·이한열 피격 사건을 계기로 6월 민주 항쟁 → 6·29 선언으로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것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다.
핵심 개념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과 통일 노력 노태우 정부는 냉전이 허물어지던 시기,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새로 수교하고 북한과도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북방 정책을 폈다.
1990 소련과 수교 1991.9 남북한이 국제 연합(UN)에 동시 가입 1991.11 한반도 비핵화 선언 발표 — 핵무기를 제조·보유·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 1991.12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 서로의 체제 인정, 상호 불가침 등을 약속 1992 중국과 수교 ★ 남북한이 국제 연합에 동시 가입한 것(1991.9)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외교 노력이 낸 성과다.
고려와 조선은 시대에 따라 중앙군의 구성과 운영 방식을 달리했다. 고려는 2군 6위 체제를, 조선 후기에는 5군영 체제를 갖추었다.
고려 중앙군(2군 6위)
2군 응양군·용호군, 왕의 친위 부대
6위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맡음
특수 조직 무신 정권기에는 삼별초(좌별초·우별초·신의군)가 별도로 활동 조선 5군영
훈련도감(1594)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창설, 급료를 받는 상비군,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
어영청·총융청·수어청 인조 때 설치
금위영 숙종 때 더해지며 5군영 체제 완성 조선 지방군
지휘 병마절도사(육군)·수군절도사(수군)가 지방군을 지휘 ★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된 것은 임진왜란 중 창설된 훈련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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