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두레·품앗이·계·향약 — 마을 안의 상부상조→조선 의창·상평창·진휼청 — 국가의 구휼→1944 조선구호령 — 근대적 형태이나 전시 통제의 성격→1945~1948 미군정 — 전재민 응급 구호와 외원기관의 등장
전통 인보상조| 형태 | 무엇을 주고받나 | 단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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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 | 노동 | 마을 전체의 공동 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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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앗이 | 노동 | 개인 사이의 교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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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 돈이나 곡식 | 목적별 조직(상포계·혼상계·학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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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약 | 규범과 상부상조 | 향촌의 자치 규약 — 네 덕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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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인보상조를 오늘의 실천에 견줄 때 유의할 점
두레·품앗이·계·향약은 오늘의 지역사회복지에 자주 인용된다. 「우리에게도 상부상조의 전통이 있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이 인용에는 값과 함정이 함께 있다.
값이 있는 대목. 첫째, 상부상조가 외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지역 단위의 상호부조는 어느 사회에나 있었고 우리도 다르지 않다. 둘째, 호혜성(reciprocity)의 원리를 보여 준다. 품앗이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이며, 받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 놓이지 않는다. 오늘의 시간은행이나 품앗이형 돌봄이 이 원리를 되살리려는 시도다. 셋째, 자율적 조직화의 선례다. 계와 향약은 관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민이 만들고 운영한 조직이며, 뒤에 볼 주민 조직화의 역사적 자산이 된다.
함정도 있다. 첫째, 관계망 안의 사람만 도왔다. 마을 구성원이어야 두레와 계에 들 수 있었고, 떠돌이나 배제된 사람은 대상이 아니었다. 오늘의 사회복지가 권리로서 누구에게나 미쳐야 하는 것과 다르다. 둘째, 갚을 수 있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품앗이는 노동력이 있어야 성립하므로, 아프거나 늙어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주고받기의 바깥에 놓였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빠지는 구조다. 셋째, 위계와 규율이 함께 있었다. 향약의 네 덕목 가운데 셋은 규범과 교화이며 과실상규는 잘못을 서로 규제하는 것이다. 상부상조와 통제가 한 몸이었고, 그 규범은 신분 질서 안에서 작동했다.
그래서 인용의 방식이 중요하다. 전통을 근거로 「국가가 아니라 지역이 돌보면 된다」고 말하면, 앞 장에서 본 비공식 돌봄 강조의 위험이 그대로 재현된다. 정확한 인용은 호혜성과 자율적 조직화의 원리를 배우되, 권리성과 보편성은 근대 제도에서 얻는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구호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1944년 조선구호령은 우리 근대 공적 부조의 첫 형태로 언급되지만, 그 성격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는 근대적이었다. 일본의 구호법을 본떠 만든 것으로, 대상을 정하고(65세 이상 노약자, 13세 이하 아동, 임산부, 불구·질병으로 노무에 지장이 있는 자), 급여의 종류를 두고(생활부조·의료부조·조산부조·생업부조), 행정 절차를 정했다. 이전의 시혜적 구휼과 달리 법에 근거한 제도의 모습을 갖췄다.
실질은 달랐다. 첫째, 시기가 1944년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정되었으며, 전시 체제에서 민심을 다독이고 노동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둘째, 적용 범위가 좁았다. 대상 요건이 엄격했고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제 수급자는 매우 적었다. 셋째, 권리성이 없었다. 급여는 은혜였지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으며, 불복할 통로도 없었다. 넷째, 식민 통치의 도구였다는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남은 것이 있다. 해방 후에도 이 법령이 상당 기간 효력을 유지하다가 1961년 생활보호법으로 대체되었다. 곧 우리 공공부조의 초기 틀이 이 법령의 형태를 이어받은 셈이며, 대상을 근로능력으로 가르는 방식이나 급여 종류의 구성에 그 흔적이 남았다.
평가의 요령은 형식과 실질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근대적 공적 부조의 형태가 도입되었다」는 서술은 맞고, 「우리 사회복지가 이때 시작되었다」는 서술은 과장이다. 시험에서도 이 구분을 묻는 선지가 나오며, 조선구호령을 실질적 출발로 격상시킨 선지가 오답으로 배치된다.
미군정기(1945~1948)도 비슷하게 보아야 한다. 이 시기의 활동은 전재민과 귀환 동포에 대한 응급 구호였고 제도의 수립은 뒤로 미뤄졌다. 앞 장에서 본 대로 그 자리를 외국 원조기관이 메웠으며, 그 구조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