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의 개별사회사업은 두 학파로 갈라져 대립했다. 진단주의(diagnostic school)와 기능주의(functional school)이며, 갈림의 뿌리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에 있었다.
진단주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기댄다. 현재의 어려움은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에서 비롯되므로, 사회복지사가 자료를 모아 진단을 내리고 그 진단에 따라 치료 계획을 세운다. 인간은 과거에 상당히 규정된 존재로 보이며, 관계의 주도권은 전문가 쪽에 있다. 뉴욕사회사업학교가 중심이었고 고든 해밀턴, 뒤의 홀리스가 대표 인물이다. 이 흐름은 뒤에 심리사회모델로 이어진다.
기능주의는 프로이트와 갈라선 오토 랭크(Otto Rank)의 의지(will) 심리학에 기댄다. 인간은 과거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정할 힘을 가진 존재이므로, 변화의 주체는 클라이언트이고 사회복지사는 그가 자기 의지를 발휘하도록 기관의 기능을 통해 돕는다. 그래서 「진단」 대신 원조과정이라 부르고, 지금-여기와 시간 제한을 중시한다. 펜실베이니아 사회사업학교가 중심이었고 제시 태프트와 버지니아 로빈슨이 대표 인물이다.
대립은 1957년 펄만의 문제해결모델에서 접점을 찾는다. 펄만은 진단주의의 자아심리학과 기능주의의 과정·시간 개념을 함께 끌어와 절충했고, 이 흐름 위에서 1970년 바틀렛의 공통기반과 1973년 핀커스와 미나한의 4체계모델을 거쳐 통합적 접근이 자리 잡는다.
두 학파의 논쟁은 승패로 끝나지 않았고 용어에 흔적을 남겼다. 오늘의 실천이 「진단」이 아니라 사정(assessment)이라 부르고, 목표와 기간을 문서로 못 박는 계약을 두며, 변화의 주체를 클라이언트로 놓는 것은 모두 이 논쟁이 남긴 결론이다.
02이해하기
같은 사람을 두고 한쪽은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물었고 다른 쪽은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가」를 물었다. 앞의 물음이 진단주의, 뒤의 물음이 기능주의이며, 오늘의 실천은 둘을 다 쓴다. 과거를 알되 거기에 사람을 묶어 두지 않는 것, 그것이 서로 다투던 두 학파를 함께 쥐는 절충의 요령이다.
03핵심 포인트
진단주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기대어 과거와 무의식에서 현재의 어려움을 설명한다.
진단주의에서는 사회복지사가 진단을 내리고 치료계획을 세우며 관계의 주도권을 쥔다.
뉴욕사회사업학교가 중심이었고 고든 해밀턴과 홀리스가 대표 인물이며 심리사회모델로 이어진다.
기능주의는 오토 랭크의 의지심리학에 기대어 인간을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존재로 본다.
기능주의는 「진단」 대신 원조과정이라 부르고 지금-여기와 시간 제한을 중시한다.
펜실베이니아 사회사업학교가 중심이었고 제시 태프트와 버지니아 로빈슨이 대표 인물이다.
기능주의에서 기관의 기능은 제약이 아니라 원조의 초점을 정해 주는 적극적 자원이다.
1957년 펄만의 문제해결모델이 두 학파를 절충했고, 이 흐름이 통합적 접근으로 이어진다.
04한 줄 예시
05시험 함정
「기능주의」의 「기능」을 사회학의 기능주의로 읽지 않는다. 여기서 기능은 기관의 기능(agency function)을 뜻하며, 사회체계의 기능을 논하는 사회학 이론과는 다른 말이다.
진단주의를 낡은 것으로만 취급하지 않는다. 자료를 모아 사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절차 자체는 오늘의 실천에도 그대로 있으며, 바뀐 것은 그 판단을 클라이언트와 함께 한다는 점이다.
펄만을 기능주의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는 두 학파를 잇는 절충주의의 자리에 있으며, 문제해결모델은 양쪽의 요소를 함께 쓴다.
시간 제한을 기능주의의 편의로 보지 않는다. 정해진 기간이 오히려 지금 할 일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 기능주의의 주장이며, 뒤의 과제중심모델이 이를 이어받는다.
같은 클라이언트가 「일을 계속 그만두게 된다」고 호소했다고 하자. 진단주의의 면접은 언제부터 그랬는지, 어린 시절 권위자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반복되는 갈등의 양상이 무엇인지를 따라가며 자료를 모은다. 사회복지사는 그 자료로 인격 구조와 갈등의 뿌리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개입의 방향을 정한다. 기능주의의 면접은 다른 데서 시작한다 — 「지금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이 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러이러한데 그 안에서 무엇을 함께해 보겠는가」를 묻고, 정해진 회기 안에서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돕는다. 여기서 기관의 기능은 제약이 아니라 초점이다. 무엇이든 다룰 수 있다는 무한정한 관계보다, 「우리는 이것을 이만큼의 기간 동안 할 수 있다」는 분명한 테두리가 오히려 클라이언트의 의지를 불러낸다고 본 것이다. 오늘의 계약과 목표설정, 그리고 시간제한 개입에 기능주의의 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절충이 남긴 것 — 사정은 하되 진단은 하지 않는다
두 학파의 논쟁이 오늘 실천에 남긴 가장 큰 결론은 용어에 새겨져 있다. 오늘의 사회복지실천은 진단(diagnosis)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사정(assessment)이라 부른다. 두 말의 차이는 작지 않다 — 진단은 전문가가 대상에게 내리는 판정이고, 사정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상황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진단은 한 번 내려지면 고정되지만 사정은 개입 내내 계속되며 수정된다. 진단은 결함을 찾지만 사정은 결함과 함께 강점과 자원을 본다. 이 전환에는 기능주의가 제기한 물음 — 「누가 변화의 주체인가」 — 이 그대로 들어 있다. 다만 절충은 기능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으고 근거를 갖추어 판단한다는 진단주의의 규율이 빠지면 사정은 인상 비평이 된다. 오늘의 실천이 물려받은 것은 진단주의의 엄밀함과 기능주의의 주체성을 함께 쥐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