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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끝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방식
조지와 윌딩의 배열에서 흥미로운 것은 스펙트럼의 양 끝이 모두 복지국가에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반집합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으로 정반대인데 결론이 겹친다.
다만 이유가 완전히 다르다. 반집합주의는 복지국가가 시장을 왜곡한다고 본다. 세금이 유인을 꺾고 급여가 의존을 낳는다는 것이며, 처방은 줄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를 지탱한다고 본다. 불만을 달래 혁명을 미루므로, 처방은 넘어서는 것이다.
시험에서 이 대비가 자주 쓰이는 것은, 「복지국가에 비판적」이라는 술어만으로는 둘을 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 시장이면 반집합주의, 생산관계의 변혁이면 마르크스주의다.
가운데 둘도 비슷한 구조로 갈린다. 소극적 집합주의와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둘 다 복지국가를 지지하지만, 앞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지지하고 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지지한다. 같은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종착점으로 보느냐 디딤돌로 보느냐가 다르며, 이 차이가 급여 수준과 보편성에 대한 태도로 나타난다.
뒤에 더해진 두 이념이 드러낸 빈자리
조지와 윌딩이 1994년에 페미니즘과 녹색주의를 더한 것은 처음 넷이 놓친 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넷은 모두 계급을 축으로 삼는다.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를 논하지만 그 논의의 주체는 남성 임금노동자를 전제한다. 페미니즘은 이 전제를 문제 삼았다. 복지국가가 여성에게 양면적이라는 것은 — 보육과 노인 돌봄을 사회화해 여성의 부담을 덜고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전제로 설계되어 여성의 권리가 배우자를 통해서만 성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족연금이 배우자에게 지급되는 구조, 전업주부가 독자적 연금권을 갖기 어려운 구조가 그 예다.
녹색주의는 다른 전제를 건드렸다. 처음 넷은 성장을 당연한 배경으로 놓는다.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를 다투되 파이가 커진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녹색주의는 성장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고 지속 불가능하므로, 성장에 기댄 복지도 지속 불가능하다고 본다. 대안으로 탈물질적 가치,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공동체 중심의 돌봄이 논의된다.
두 이념이 더해진 것은 복지국가 논의가 계급 축 하나에서 여러 축으로 넓어진 것을 뜻하며, 뒤에 나오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 논의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