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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에서 상대로 옮겨 간 이유와 그 대가
20세기 초의 빈곤 연구는 절대적 개념에서 출발했다. 라운트리가 요크에서 물었던 것은 「이 가구가 육체적 효율을 유지할 수 있는가」였고, 답은 필수품 목록과 그 가격으로 구했다.
이 방식은 강점이 뚜렷하다. 기준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시간이 지나도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있으며, 「이만큼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개발도상국의 절대빈곤 논의나 세계은행의 하루 소득 기준선이 여전히 이 계열이다.
그런데 선진국에서 이 방식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생존에 필요한 열량만 따지면 빈곤율이 거의 0에 수렴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끼고 실제로 사회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어 구직을 못 하고, 교복 값이 없어 아이가 학교에서 겉도는 상태를 「굶지 않으니 빈곤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타운센드가 빈곤을 「그 사회에서 관습적인 활동과 생활양식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로 다시 정의한 것이 이 지점이다. 빈곤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문제이며, 필요한 것은 사회마다 시대마다 달라진다.
대가도 있다. 상대적 빈곤선은 분포에 따라 움직이므로 모두의 소득이 두 배가 되어도 빈곤율은 그대로다. 「빈곤을 없애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한 정의 아니냐」는 비판이 여기서 나온다. 또 불황으로 중위소득이 내려가면 빈곤선도 내려가 빈곤율이 줄어 보이는 역설도 생긴다.
그래서 실제 정책은 대개 둘을 섞는다. 우리 기준 중위소득은 상대적 기준이지만,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실제 지출 실태를 함께 고려하도록 한 것은 절대적 관점을 남겨 둔 것이다. 개념을 하나만 쓰는 나라는 드물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서술형에서도 쓸 수 있다.
센의 역량 접근이 빈곤 개념에 던진 물음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을 소득의 부족이 아니라 기본적 역량(capability)의 결여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기능(functioning)은 사람이 실제로 이루는 상태나 행위다 — 잘 먹는 것, 건강한 것, 교육받는 것,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 역량(capability)은 그 기능들의 조합을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왜 소득으로는 부족한가. 같은 소득이라도 소득을 기능으로 바꾸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으면 같은 소득으로 이동과 참여를 이루기 어렵고, 만성질환이 있으면 의료비로 소득이 빠져나간다. 임신·출산기의 여성,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 차별받는 집단도 마찬가지다. 센은 이를 전환의 이질성이라 불렀다.
이 관점이 정책에 주는 함의가 셋이다. 첫째, 현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의료·교육·이동·돌봄 서비스가 함께 있어야 같은 소득이 같은 삶으로 바뀐다. 둘째, 빈곤은 다차원으로 재야 한다 — 소득 한 줄로는 놓치는 결핍이 있다. 유엔개발계획의 다차원빈곤지수(MPI)가 이 생각에서 나왔다. 셋째, 목표는 결과의 균등이 아니라 선택할 자유다.
비판도 있다. 역량은 측정하기 어렵고, 어떤 기능을 목록에 넣을지에 결국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는 지적이다. 누스바움이 역량 목록을 제시한 것과, 센 자신이 목록을 확정하기를 거부하고 공적 토론에 맡긴 것이 이 논쟁의 두 답이다.
시험에서는 대개 「자원이 아니라 역량」이라는 한 줄로 나오지만, 왜 소득만으로는 부족한지를 전환의 이질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서술형에서도 밀리지 않는다.